“딱 하룻밤에 3억 원” 하루술값 세계 신기록 갱신한 이 남자는
여러분이 하룻밤에 써 본 가장 큰 돈은 얼마인가요? 각자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또 차곡차곡 저축파인지 오늘만 사는 기분파인지에 따라 그 금액은 천차만별일텐데요. 아무리 화끈하게 술값을 내는 분일지라도 오늘의 주인공보다 많은 돈을 지출해본 적은 없으실 겁니다. 당시 23세였던 알렉스 호프는 한 호텔 클럽에서 하룻밤에 3억원 가량을 썼으니까요. 대체 이 젊은이는 어디서 이렇게 큰 돈이 난 건지, 술을 얼마나 시키면 몇 억짜리 계산서가 나오는지 지금부터 함께 알아볼까요?
◎ 23세 청년이 벌인 억단위 술파티
런던 근교의 도크랜드에 사는 23세의 알렉스 호프는 2012년의 어느날 리버풀 힐튼 호텔 지하의 클럽을 찾습니다. 그리곤 30리터짜리 아르망 드 브리냑의 마이다스 샴페인을 주문했죠. 아르망 드 브리냑은 화려한 외관과 비싼 가격 때문인지 클럽에서 과시용으로 많이 주문하는 술인데요. 호프가 주문한 것은 보통 아르망 드 브리냑 40병에 해당하는 크기였습니다.
두 명의 웨이터가 이 초대형 샴페인 병을 어깨에 짊어진 채 호프의 테이블로 서빙했고, DJ는 이 장면을 멋지게 연출하기 위해 영화 의 주제곡 ‘더 던 오브 맨(The Dawn of Man)’을 플레이했다네요.
여러 매체들을 통해 공개된 그날밤 영수증을 보면, 이 30L 샴페인 한 병만 해도 12만 5천 파운드(한화 약 1억 8천 여만 원) 에 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호프는 그보다 작은 사이즈의 아르망 드 브리냑 샴페인 몇 병에 40병의 일반 크기 아르망 드 브리냑-에이스 오브 스페이드, 그리고 4천 파운드어치의 그레이 구스 보드카를 추가로 주문했죠. 레모네이드와 콜라를 비롯한 음료도 추가되었습니다. 술과 음료값에 10%의 봉사료 까지 붙자 그가 지불해야할 총 금액은 203,948 파운드 (한화 약 2억 9천 850만 원)에 이르렀죠.
한가지 재밌는 점은 정작 알렉스 호프 자신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클럽에 있었던 목격자는 ‘호프는 자기 테이블의 친구들 뿐 아니라 클럽 안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술을 돌렸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술기운이 없어보였다.’고 전했는데요. 이에 사람들은 계산서 상 레모네이드와 콜라가 호프의 차지였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 그의 정체는 천재 외환 트레이더?
그런데 당시 23세에 불과했던 이 청년은 어떻게 하룻밤에 3억을 지불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번 걸까요? 금수저 집안의 망나니 아들일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호프 본인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환 거래를 통해 돈을 벌었다고 주장했죠.
호프는 학교를 졸업한 후 시장 가판대나 버거 가게에서 일하는 동시에 자신의 방에서 통화 거래를 시작했다는데요. 500파운드를 가지고 통장을 개설한 뒤 금을 거래해 하루만에 두 배로 불렸다는 겁니다. 이후 그의 재산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했다고요.
◎ 아들의 헤픈 씀씀이에 어머니는 충격
언론들이 이 돈자랑 파티를 앞다퉈 보도하자, 알렉스 호프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습니다. 런던 남동쪽의 데프트포드에 거주하는 53세의 티나 호프는 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한 번에 그렇게 많은 돈을 날려버리다니 충격적이다”라며 자신의 심경을 밝혔죠.
알렉스 호프가 클럽에서 쓴 돈이 티나 호프의 집 시세와 맞먹는다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만도 한데요. 그는 “알렉스가 그 많은 술을 다 마신 것은 아니길 빈다.”고 우려를 표하는가 하면 “착한 아이라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 폰지 사기로 감옥행
철없는 씀씀이로 어머니 심장을내려앉게 했던 이 청년은 현재 어떤 모습일까요? 외환거래로 계속 돈을 벌어 더욱 화려한 파티를 즐기고 있을까요? 그러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 광란의 파티로부터 3년 후, 알렉스 호프는 폰지 사기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죠. 호프는 자신의 멘토라는 57세의 라지 본 베들로와 함께 4백29만파운드(한화 약 63억 원) 에 달하는 투자금을 모은 뒤 카지노와 클럽 등 유흥에 200만 파운드 (한화 약 29억 4천만 원)를 탕진했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얌전히 반성이나 했다면 좋았을 텐데, 역시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가 봅니다. 2016년 4월 ‘돈을 벌어 추징금을 지불하고 푸드 뱅크에 기부하겠다며 며칠 간의 외출을 허락받은 그는, 돈을 벌기는커녕 7만 5천 파운드 (한화 약 1억 1천만 원)을 탕진합니다. 그가 돈을 쓴 곳은 프로세코 42병, 찰리와 초콜릿 공장 뮤지컬, 복싱 경기 그리고 리하나 콘서트였다는데요. 이 일로 인해 16개월의 징역형이 추가되었다는 소식입니다.
EDAILY 외환
[이데일리 문정현 기자] 씨티은행의 트레이딩룸은 다른 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돼 있다. 안내를 해주던 홍보실 직원이 "같은 팀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마음대로 못 들어간다"고 웃으며 내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출입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장이 끝난 후여서 그런지 트레이딩룸은 비교적 조용했다. 딜링룸 안쪽으로 들어가니 류현정 파생상품운용부 부장 (아래 사진) 이 선 채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앉은 류 부장은 얼굴은 조금 피곤해보였다. 눈을 부비는 모습을 보고 일이 많았냐고 묻자, "종일 모니터를 보고 있어서 그런지 장이 끝나고 나면 초점이 잘 안맞는다"며 웃었다.
류 부장은 자신만의 '뷰'로 시장에 접근하는 트레이더로 유명하다.
류 부장은 "고객 물량을 처리하는 트레이더가 아닌 리스크를 감수하는 프랍(prop) 트레이더로, 맡은 업무가 다르기 때문에 중장기 뷰를 가질수 밖에 없다"며 겸손해 했지만, 남다른 깊이의 시각으로 업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오랜 전문성과 자신감 때문일까. 예전 같이 일했던 직원이 "시장이 변하면 아무래도 트레이더들이 동요되기 십상인데, 부장님은 마치 바둑을 두시듯 평온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매일같이 식염수로 미리 건강 관리를 한다는 말에 그의 프로다운 면모가 엿보였다.
`시장의 컨센서스를 잘 파악하는 것이 트레이딩 철학`이라고 말하는 류 부장과 대화를 나눠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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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티은행 딜링룸 구성은?
▲부행장이 지휘하는 자금시장그룹 안에 크게 세 파트가 있다. 은행 정책과 원화 및 외화 듀레이션 조절, 부채·자산 조절을 담당하는 자금부와 금융상품을 파는 외환파생영업부가 있다. 다만 씨티증권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식과 관련된 파생상품은 팔지 않는다. 트레이딩부가 속해있는 부서는 외환파생운용부다. 이 가운데 FX스팟, FX옵션, FX스왑을 담당하는 인력은 5명이다. 씨티은행은 트레이딩의 자율성이 보장된다. 하루하루 대응에 대한 관여는 지나치게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외환시장에서 씨티은행의 강점은?
▲강점이라고 하면 스왑도 그렇고 스팟도 그렇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 팀 내에 있다는 것이다. FX스왑을 담당하는 조윤정 부장은 11년, FX스팟을 담당하는 고상준 부부장은 9년, FX옵션을 담당하는 오희석 부부장은 6년 정도 업계에서 일한 전문가다.
또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에 고객이 다양하게 많다는 것도 장점이다. 로컬 은행은 국내 기업이 주 고객인 경우가 많은데, 씨티은행은 싱가폴을 통해 헤지펀드 거래도 들어온다. 씨티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삼는 다국적 기업이나, 대기업의 물랑도 많다. 금융위기 이후 FX옵션 트레이딩이 각 은행에서 와해되다시피 했는데 우리는 아직 있다.
-헤지펀드 등 역외에서는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 것 같나.
▲현재로썬 원화 강세를 예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지난해 연말부터는 리스크테이킹이 커지면서 아시아 통화가 상대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 인도, 중국에 대해 강세, 엔과 유로에 대해선 약세 베팅을 하는 분위기다.
-트레이딩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1988년에 한미은행에 입행했고 1993년부터 외환 트레이딩을 했다.
-입행 후 바로 트레이딩을 한 것은 아닌데, 어떤 계기로 하게 됐나?
▲입사 후 대리로 승진하고 지점에서 3~4개월 근무했는데, 이 때 내 자신에게 많은 실망을 했었다. 대리라는 직급이 나름 자기 선에서 결제도 할 수 있는 초급 관리자였는데, 개인적으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주위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좋았지만 '내가 받는 월급만큼 가치창출을 하고 있는가'란 회의만 계속 들었다. 그러던 와중 행내 공모를 통해 다른 업무에 지원했다가 외환관련 연수를 몇 과정 밟고나서 딜링룸에 합류하게 됐다.
-옮기고 나서 어땠는지.
▲(손을 양쪽으로 크게 펼치며) 파라다이스였다.(웃음) 당시 성과급, 보너스라는 개념도 없었는데..그때 느낀 성취감은 말로 할수 없었다. 트레이딩에 맞는 뭔가가 내 속에 있었나 보다.
-트레이딩이 적성에 맞는것 같다.
▲카드게임 등 잡기(웃음)를 원래 잘했다. 지금은 체력이 안되지만. (승부욕도 있는것 같다고 묻자) 하지만 승부욕을 아무데서나 부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한 업무에서 손님이 환율 적용(외환 거래에서는 그 거래가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적용하는 환율이 다르다고 한다)을 원래 해야하는 방식말고 다른 방식으로 해달라고 했는데, 그게 현금으로 350원이 차이가 났었다. 상사한테 불려가기까지 했지만 난 그 거래를 할 수 없다며 끝까지 거절했다. 하지만 그 때 난 잘못된 승부욕을 부린 셈이다. 고객과 `승부`를 할게 아니라 마찰없이 원만하게 해야한다는 위치라는 걸 잊었던 것이다. 그 후 지기싫어하는 것도 때에 따라 가릴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여가활동에 지나치게 승부욕을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기억나는 성과는.
▲딱 어느 순간이라고 고르기 어렵다. 대체로 급하게 움직이는 시장에서는 대응을 잘했던 것 같다. 1998년 외환위기 때 대응도 그동안의 딜링 경험을 살려 잘 했고. 2008년~2009년초까지의 이후 상승장에서도 대응이 좋았다.
-보통 딜러는 감을 중요시하는데, 인사이트있게 시장을 보는 딜러라고 전해들었다. 시장을 분석하는 자신만의 구체적인 방법이 있나.
▲프로그램이나 툴 같은 것은 없다. 트레이딩 철학은 시장 컨센서스, 즉 시장의 공통된 생각에 자신의 로직을 잘 대응시키는 것이다. 먼저 시장의 키 드라이브(핵심동력)가 뭔지 잘 봐야한다. 이에 따라 한달 내내 롱으로 갈수도 있고, 숏으로 갈수도 있다. 물론 롱이든 숏이든 그때그때마다 양을 조절해야되고 필요에 따라 단기 대응을 할수도 있지만, 항상 단기적으로 대응만 하다보면 힘들다. 단기 대응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치중하다보면 자신이 예상했던 시장 방향과 반대로 포지션을 잡게 될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면 환율 상승을 전망하고 있으나, 단기적으로 미세조정 (하락) 가능성에 대응하고자 달러를 팔았다면 예상대로 환율이 오르더라도 이익을 내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손실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로는 시장 참여자들의 생각을 잘 파악해야한다. 예를 들어 2007년말, 2008년 초에 이미 매크로한 데이터들은 하락 반전하고 있다. 경상수지 적자 등으로 인해 환율 상승 요인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들을 비롯한 수출 기업들의 적극적인 달러 선물환 매도 때문에 환율은 하락하고 있었다.
-이처럼 시장의 상충된 상황이 발생할 때 고민이 클 것 같은데. 예를 들어 매크로 신호는 이쪽 방향인데 시장 참여자들이 그렇게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는지.
▲잘 안 풀리는 날에는 그날 앉아서 노트에 적어본다. 환율이 오를 변수, 내릴 변수 등을 나름대로 쭉 정리해서 써보고 고민한다. 다른 딜러들과 전화해서 의견을 들어보기도 하고, 분석 리포트 같은 것도 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자기 뷰가 당장 시장에는 맞지 않더라도, 흐름을 바꿀만한 신호를 잘 봐놓지 않으면 나중에 시장이 뒤집힐 때 빠르게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취미는 무엇인가. 체력관리를 위한 운동을 하는 것이 있나.
▲예전에는 바둑도 두고 볼링도 쳤다. 볼링은..퇴근할 때 혼자서 한시간 동안 5~6게임 치기도 했는데, 안한지 오래됐다. 지금은 가끔 골프를 치지만, 내 자신이 머릿속에 생각하는 레벨과 실제 레벨이 달라서 많이 치진 않는다. 그 외는 동네 한바퀴 산책 정도?(웃음)
◇ 류현정 씨티은행 외환파생운용부 부장 프로필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한미은행 입사, 국제부 근무
-한미은행 딜링룸 외환 트레이딩
-한미은행 자금부 트레이딩 헤드
-씨티은행 자금부 외환데스크 부장(한미은행과 씨티은행 통합)
엔고에 놀란 日당국 '스텔스 개입' 나설까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공포에 엔·달러 환율의 주요 지지선인 106엔이 무너지자(엔화 강세) 외환 트레이더들 사이에서 일본 당국이 '스텔스 개입'에 나설 수 있다는 추측이 번지고 있다고 5일(현지시간) 전했다.
스텔스 개입이란 외환 당국이 자국 통화 가치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스텔스 전투기처럼 환시에 장기간 비공식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트레이더들은 1조6000억 달러 규모의 일본 후생연금(GPIF)의 해외 자산 매입 계획을 앞당기는 방식으로 환시에 개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해외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선 엔화를 팔아 해외 통화를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엔화 강세를 일부 상쇄할 수 있다.
만수르 모히-우딘 냇웨스트마켓츠 선임 전략가는 "안 그래도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로 엔화가 상방 압력을 받고 있었다"면서, "GPIF나 여타 국영펀드 매니저들은 앞으로 몇 달에 걸쳐 환시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일본 당국의 구두 개입이 엔고 저지에 효과를 내지 못하고, 공개적인 개입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로부터 강한 반발을 가져올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방식은 새로운 개입 FX피플)`시장을 꿰뚫는 통찰력`-류현정 씨티銀 부장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FT는 전했다.
하루 전 엔고에 놀란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BOJ)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다케우치 요시키 재무성 재무관은 "극심한 환율 변동은 경제·금융에 바람직하지 않다. 필요에 따라 주요 7개국(G7)과 20개국(G20) 합의대로 대응할 것"이라며 구두 개입에 나섰지만 엔고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간밤엔 무역전쟁 공포가 더 높아지면서 엔·달러 환율이 105엔대 중반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세계 최대 연금펀드인 GPIF는 전체 자산에서 해외 채권 비중이 17%, 해외 주식 비중이 25.5%다. 각각의 목표치인 15%, 25%를 소폭 상회하는데, 목표치 대비 일정 수준의 변동이 용인된다. 모하-우딘 전략가는 GPIF가 해외 자산을 매입할 수 있는 여력이 1400억 달러어치 남아있다고 추산했다. 이어 그는 이런 개입 가능성이 도는 것만으로도 엔화 상승 흐름을 저지하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일각에선 GPIF를 통한 개입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제스퍼 콜 위스턴트리재팬 대표 등은 GPIF는 정치적 산물이 아니며, GPIF의 거버넌스 모델은 환시 개입에 이용될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6일 아시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106엔대를 다시 회복했다. 중국이 위안화 이날 예상보다 위안화 가치를 강하게 고시, 위안화 하락 속도를 조정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영향으로 풀이된다. 한국시간 오후 1시20분 현재 엔·달러 환율은 전일 뉴욕 외환시장 종가 대비 0.78% 오른 106.77엔을 가리키고 있다.
세계 외환거래 역사 및 FX마진 국내 현황
인류의 ‘외환거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세계 ‘ 외환거래 역사 ‘는 수백 년 전후할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FX마진거래 (이하 외환거래)의 역사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달러의 역사와 HTS의 보급
그 전에 먼저… 외환거래의 중심이 되는 달러의 역사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포함한 유럽 열강의 경제력은 약화되고 전쟁 특수를 배경으로 미국의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세계 기축통화는 파운드화에서 달러화로 바뀌게 되었다. 1944년에 이르러서는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모든 통화의 가치는 달러에 고정시키는 금본위제에 입각한《브레튼 우즈 체제》가 시작되면서 세계 외환시장에는 고정환율제도가 도입된다.
하지만, 당시는 완벽하리라 생각했던 이 금융시스템도 30년을 못 버티고 또다시 무너지게 된다.
배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량의 통화 발행으로 더는 달러의 가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미국은 1971년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폐기하게 되고, 세계 외환시장은 다시금 ‘변동환율제’로 돌아간다. 이로써 풍부한 유동성과 변동성을 얻게 된 외환시장은 세계 경제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최대의 금융시장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각국의 핫머니(투기자금)가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합법적인 ‘국제 도박장’으로 변모해 갔다.
정부 중앙은행과 글로벌 투자 은행, 연기금, 큰손 헤지펀드 등 일부 기득권층만이 FX피플)`시장을 꿰뚫는 통찰력`-류현정 씨티銀 부장 입장할 수 있었던 ‘스페셜 무대’ 위에서 FX 외환거래 역사의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IT 통신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HTS (홈트레이딩 시스템)의 보급으로 이어졌고, 21세기를 전후로 드디어 개인 투자자도 금융 파생상품 시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 중에서도, 주식과 같은 전통적인 투자방식의 취약점 (내부거래, 비 효율적 주문방식, 개미에게 불리한 공매도 시스템, 낮은 유동성 등) 을 커버할 수 있는 FX마진거래와 같은 파생상품이 대중화 되면서 ‘기울어진 운동장’ 의 경사는 점차 완만해지고 있다.
‘선물거래’로 보는 FX 외환거래 역사
‘유사해외통화선물거래’이기도 한 ‘FX마진거래’의 탄생 배경과 역사를 이해하려면,그 원형이 되는 ‘선물거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므로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원조 파생상품 ‘선물거래’의 탄생
투자자들의 바이블 격인 캔들봉차트와 마찬가지로 선물거래 또한 옆나라 일본에서 탄생했다. 1730년 오오사카의 도지마(堂島)라는 지역에서 ‘장부상 쌀거래’ (帳合米取引) 시장이 공설되었는데, 여기에서 오늘날의 ‘차액결제 거래(CFD)’ 와 ‘공매도’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되면서 증거금과 레버리지를 FX피플)`시장을 꿰뚫는 통찰력`-류현정 씨티銀 부장 활용한 거래로 발전되게 된다.
그 후, 산업혁명을 거치며 팽창하는 주식시장과 더불어, 1848년에는 미국에도 공식 선물 거래소인 ‘시카고 상품거래소’가 설립된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 시대…1986년 영국에서는 자본주의 시장의 ‘빅뱅’이라 불리우는 대규모 금융개혁이 단행된다. 크고 작은 전쟁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성숙해진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에서 결정적인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증권업무의 컴퓨터 전산화, 수수료 개정, 은행자본 투입 자유화, 마켓메이커 제도 도입 등의 변혁이 비슷한 시기에 금융업계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FX 외환거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CFD’를 알아야 외환거래 역사가 보인다
위와 같은 변화의 물결 속에서, 90년대 초반 영국에서는 선물거래에서 차용한 ‘차액결제’와 ‘증거금’, ‘양방향 수익구조’의 개념을 도입한 각종 CFD(contract for difference) 상품이 탄생한다. 주로 채권, 주식 주가지수, 금 시세 차트와 연동된 파생상품이다. 그리고 수년 후, 9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이 개념을 외환거래에 도입한 ‘FX마진거래’가 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CFD 파생상품들은 선물거래와는 달리 수수료가 저렴하고 만기가 없으며 국경이 없는 장외시장 (점두거래) 에서 주로 이뤄지기 때문에 사실상 24시간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즉, CFD의 역사가 곧 외환거래 역사 라고 말할 수 있겠다.
FX마진거래도 CFD 상품에 속하긴 하지만,
그 시장 규모가 압도적으로 거대한 이유로 현재는 이 범주에서 빠져나와 독립된 금융상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즉, 오늘날의 CFD는 증거금 및 차액결재 시스템을 바탕으로 각국의 주가 지수나 금,오일 시세 등에 투자하는 ‘장외’거래 (점두거래=대고객거래=영업점거래)를 일컫는다.
참고로, 인구가 우리나라의 반 밖에 안되는 호주에서도 2004년 이후 적극적 규제 완화로 인해 CFD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 인구는 약 4만 5천 명 (2015년 기준)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영국에서도 런던증권거래소 주식 거래량의 약 40%가 CFD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기획재정부는 도대체 무슨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내에서도 2016년에 규제가 완화되어 5억원 이상의 투자금을 가진 개미라면 이 CFD 바닥에서 놀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금감원는 5억원이 무슨 동네 강아지 이름이라도 되는 줄 아는감?
이처럼, 오늘날에는 각종 파생상품들의 매력이 극대화 되면서 FX마진거래 또한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세계 외환거래 역사는 다시 쓰여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의 금융시장은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개미들의 ‘천국’ 이 되어가고 있다.
‘와타나베부인’의 등장과 일본의 외환거래 역사
아시아에서는 홍콩, 싱가폴을 거처 1998년에는 일본에 정식 도입되었으나, 도입 초기에는 불편한 전화 주문이 일반적이었고, 지금의 한국과 같은 고액의 증거금이 필요한 복잡한 금융상품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저금리 통화의 대명사였던 ‘엔화’를 매도해서 금리 차익을 올리는 ‘캐리트레이드’가 성행하면서, FX마진거래가 전 국민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금융 문외한’이라 치부 되던 주부층까지 FX마진거래의 매력이 알려지고, 짬시간 투자활동만으로도 고수익을 올리는 주부와 회사원, 각종 탈세 사례들이 속출하면서 언론에 단골로 보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2002년~ 2005년 사이에 FX로 대박나서 무려 4억 엔 (약 40억 원)이라는 세금을 탈세한 50대 주부가 유명하다)
이즈음, 일본의 외환거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등장한다.
개인 투자자들이 세계 외환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자, 기관투자자들도 이들의 존재를 주시하기 시작했고 ‘와타나베부인’ (또는 ‘기모노트레이더’) 이라는 단어가 일본인 개인 투자자를 뜻하는 대명사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해외 헤지펀드들이 일본 개미의 급소(대량 손절 매물대)를 노리는 기법을 ‘와타나베부인 사냥’이라고 한다.
국내 FX 외환거래 역사 및 현황
한국거래소(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통합 출범되던 2005년, 드디어 대한민국에서도 선물거래법시행규칙이 개정되며 FX마진거래 가 합법화 되었고, 당시 업계의 주목도는 일본 못지 않았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주식‧채권 등의 수익률이 약해지고 한국의 기준금리 하락을 배경으로 ‘강달러’ 현상이 지속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FX마진(외환증거금) 거래가 새로운 재테크 수단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국내 외환거래 역사는 어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대한민국 외환거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급하게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법.
급성장하던 우리나라의 외환시장에도 이윽고 각종 양아치 회사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단순한 투기꾼 마인드로 대박을 꿈꾸는 개인 투자자들이 넘쳐나면서, 장래 유망한 금융상품이었던 FX마진거래는 어느새 도박에 가까운 머니게임으로 전락하게 된다.
금융 파생상품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일반 개미들이 그 위험성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체 거대 시장에 뛰어든 결과는 참담했다.국내 선물사 전체, 약 6000 계좌의 90%에서 손실이 발생하면서 ‘FX마진 = 초 고위험 상품’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2009년 기준)
그러나 다행히도 그 후에는,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많은 투자자들이 증거금 거래의 위험성을 알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학습하는 투자자가 늘어나면서 손실계좌의 비율은 매년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2016년 KB증권의 1/4분기 보고에 따르면 36%까지 떨어졌다!! (즉, 64%의 계좌에서 이익 창출)
양아치 악덕 업자들의 만행
한편, 관련 규제법안의 부재로 사각지대에 놓인 FX마진거래 업계 안에서는 무허가 선물사들의 위법적 수익구조 (체결거부, 스프레드 및 슬리피지 조작 등), FX를 위장한 불법 유사수신행위(가짜 금융업), 해외 선물사들의 국내 무허가 온라인 영업 등이 성행하면서 난잡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대한민국 외환거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금융당국의 규제로 절멸의 위기에 놓인 FX마진 트레이더 !
개미들의 손실이 절정을 이루던 2009년, 레버리지가 종전의 50배에서 20배로 하향조정 되면서, 많은 트레이더들이 다른 시장으로 갈아타기 시작했고, 2012년 4월 이메가 정부 말기에는 설마 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난다.
‘증거금 상향과 거래위험 고지강화’ 등을 골자로 한 ‘FX마진 건전화 방안’이 시행되면서 레버리지가 10배로 축소되고 마진콜율은 기존의 30%에서 50%로 올라갔다. 즉, 거래 개시에 필요한 납입액(개시 증거금)이 5천 달러에서 1만 달러로 대폭 인상되었고, 강제청산의 기준이 되는 유지증거금도 3천 달러에서 5천 달러로 대폭 상향 조정된 것이다.
그 결과, FX마진거래의 매력도는 현격히 낮아지고 진입 장벽은 높아지면서, 수 많은 개미 투자자들이 국내 증권-선물사의 HTS를 버리고, 해외 또는 국내 불법업자의 시스템을 찾기 시작했다. 이 여파로, 영업을 포기하는 증권-선물사들이 속출하면서 2015년 국내 FX마진거래 시장의 규모는 전성기의 10분의 1 수준으로 축소되며 괴멸 상태에 빠지고 만다.
사실상 국내 FX 외환거래 역사의 종말을 초래하는 정부 규제였다.
국내 FX 외환거래 역사의 한 줄기 빛
여기까지 읽고 한숨만 내쉬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나, 그래도 한때는 파생상품 거래규모 세계 1위를 차지했던 대한민국 금융시장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미국,유럽 대비 저렴한 수수료 체계를 갖춘 일본의 선물사로부터 호가를 제공받는 증권-선물사들이 늘어나면서 서비스의 질이 개선될 조짐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나금융투자의 경우, 별도 수수료가 있긴 하지만 ‘달러-엔’의 스프레드가 0.5 핍 (유로-달러는 0.6 핍) FX피플)`시장을 꿰뚫는 통찰력`-류현정 씨티銀 부장 까지 내려갔고, 다른 증권사나 선물사 (브로커) 들도 1.5핍 수준까지 내려왔다.
아직 일본이나 유럽, 중동, 중남미 등의 우량 브로커들과 비교하면 갈 길은 멀었지만, 10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개선된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금융당국의 규제가 여전히 너무나 완강한 탓에, 해외 브로커 (증권 ,선물사) 와의 서비스 품질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는 현실도 있다.
아직까지는 국내 업체들을 사용하기에 적절한 시기는 아니지만, 앞으로 국내 마진거래 업계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하나하나 벗겨진다면, 머지않은 미래에는 대한민국도 일본 못지 않은 FX 마진거래 선진국으로 도약할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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